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루살렘 왕국 (문단 편집) ====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의 제6차 십자군 원정 ====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 태생이다. 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가 유명을 달리했고 오랫동안 시칠리아는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기에 주변의 환경은 유럽과 달리 이슬람의 색채가 강했다. 자연스럽게 프레드리히는 무슬림에 깊게 공감을 하게 되었고, 주변의 가신들은 그런 어린 주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결국 1197년 센시오 살벨리(Cencio Savelli)라는 유럽의 문화를 잘 간직한 신부가 프리드리히의 가정 교사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9년 뒤 호노리오 3세(Honorius III)로 교황이 된다. 새 교황은 과거 자신의 학생이었던 프리드리히가 자신의 말을 잘 이행할 거라고 믿고 여러가지 절차를 순탄하게 진행하여 1220년 이 제자에게 로마의 황제를 선언하며 자신이 대관식을 집행했다. 1225년 6월 20일에 교황청과 신성 로마 제국이 다음에 있을 십자군을 위하여 산 게르마노 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예루살렘의 위태로운 상황을 신성 로마 제국의 힘으로 타파하기 위함이었다. 주요 협약은 황제가 2년 동안 천 명의 기사와 2천 명의 다른 기사들을 성지로 보내거나[* 당시 기사는 각 한 명에 그에 따른 종자, 부대 병사와 보급 부대를 생각하면 수 만의 군대이다. 이름 있는 장교 급만 총 3천 명을 동원하라는 건 대군을 일으키라는 뜻], 10만 데니어를 기부하거나, 파문을 당하거나였다. 체결 후 곧바로 원활한 교황의 청사진을 실현하기 위해 이사벨 2세와 황제의 결혼을 종용했다. 이 엄청난 제안에 장 1세는 열렬히 동의하며 딸의 결혼식을 축하했지만, 1225년 11월 9일 프리드리히 2세는 장인 장 1세를 왕국 정부에서 쫓아냈다. *''' 프리드리히 & 이사벨 2세 ''' 프리드리히 2세는 그렇게 조각난 예루살렘 왕국에 프리드리히라는 왕명으로 국왕이 되었기에, 뒤따르듯이 당연히 옛 영토를 회복해야 하는 이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1227년이 왔고 때마침 스승이자 교황이던 호노리오 3세가 자신의 꿈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선종한다. 곧이어 교황이 된 그레고리오 9세는 곧바로 황제에게 십자군의 참전을 닥달한다. 하지만 당시 막 황제가 된 프리드리히는 자신을 쥐고 흔들던 스승이 죽자, 신성 로마 제국의 내부 문제에 힘을 쓰게 된다. 변명을 일삼으며 십자군 종군을 미루고 미루더니 결국 산 게르마노 조약을 어기게 되었고 곧바로 파문을 당하고 만다. 중세 시절 종교는 대단한 권력이었다. 황제의 권력조차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기에 농노라고 할지라도 파문의 대상자를 살해해도 죄를 면할 정도로, 파문은 사회적 지위의 말살과 직결되었고 파문을 당한 황제의 권위 역시 바닥을 치게 된다. 6차 십자군은 결국 파문을 당한 황제의 고해와 참회에 따른 보속 행위로 이루어졌다. 1228년 6월 황제는 레반트로 항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지로 직진하는 대신 먼저 키프로스 섬으로 항해했다. 키프로스 섬은 사자왕 리차드가 제 3차 십자군 당시 아크레로 가는 길에 점령 한 이후 여러가지 정치적 이유에 의하여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다. 황제의 키프로스 입장은 왕국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각인하려는 명확한 의도를 가진 통치 행위였다. 그 당시 키프로스 왕국은 예루살렘 왕국의 장 1세에게 축출되었던 장 디블랭이 베이루트의 백작 지위를 유지하며 키프로스로 망명하여 수완을 발휘하여 왕국을 삼키고 있었고 뤼지냥 왕조의 귀족들과 대립을 하는 상황이었다. 아직은 왕국의 법적 권위가 더 높았던 원주민 기사들은 황제의 방문에 우호적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베이루트의 장에게 그의 정치적 지위는 불법이며 황제의 권위에 굴복할 것을 요구했다. 장은 제국의 황좌에 키프로스와 예루살렘 왕국은 헌법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그의 주장에 베이루트의 주권을 가진 본인이 징벌적 형벌을 받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당시 성지에서 강력한 가문이었던 이벨린 가문을 소외시켜 황제에게 대항함으로써 훗날 십자군에게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파일:Federico_alkamil-1-1.jpg|width=100%]]|| || 알 카밀(우)와 협상하는 [[프리드리히 2세]] (좌) || 프리드리히는 우트르메르 본토에 상륙하여 [[알 카밀]]과 협상을 시도하였고, 협상이 결렬되자 자파로 남하하였다. 알 카밀은 다마스쿠스를 포위하여 아이유브 왕조 내의 내전을 정리하기 위해, 프리드리히는 교황의 [[시칠리아 왕국]]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다시 협상을 시작해 합의에 도달하였고, [[1229년]] [[2월 18일]] 예루살렘[* 다만 성전산 일대는 계속 무슬림 소유로 남았으며반환지 내 거주하는 무슬림들의 자치 및 예루살렘의 통행의 자유가 보장되었다.]과 베들레헴, 나사렛, 갈릴리 서부 (토론) 일대와 해안까지 이어지는 회랑, 그리고 분쟁 대상이던 시돈 외곽 영토를 할양받고 10년 휴전에 합의하는 야파 조약을 체결했다. [[3월 17일]]에는 프리드리히가 예루살렘에 입성했고, 다음날 대관식을 거행했다. 프리드리히는 토착 귀족들의 반발 속에서 시돈의 발리앙과 독일 귀족 베르너 폰 에기스하임을 섭정으로 지명하고 남이탈리아로 돌아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